애달픈 엄마의 사랑

철없던 시절의 방황

남들보다 일찍 결혼한 엄마는 아빠의 부재로 나와 밑으로 셋이나 되는 남동생들까지 홀로 돌봐야 했다. 어려운 형편에 친정과 시댁을 전전하면서 살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아등바등 억척스럽게 생계를 꾸렸다. 어렸던 나는 그런 엄마의 어려움을 헤아리기보다 그저 양친(兩親)이 있는 친구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샘도 났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한 엄마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졌고, 마음은 삐뚤어져 사춘기 시절의 방황으로 이어졌다.

학창 시절, 엄마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한 일이 있었다. 엄마는 동생들 돌보기 바쁘니 내가 잠시 사라져도 걱정하지 않을 거란 철없는 생각에서였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것도 잠시, 어느덧 가지고 온 여비를 전부 탕진했다. 노느라 돌아갈 차비까지 다 써버리고 휴대폰도 없었던 나는 막막함에 휩싸였다. 영락없이 고아가 되겠구나 싶어 두려웠다. 누구에게 빌려서라도 엄마에게 전화할까 생각하다가도 혼날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길 잃은 아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런데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시내를 배회하던 내 앞에 갑자기 경찰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거기서 내린 것은 인천에서부터 나를 찾아온 엄마였다. 고아가 되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엄마를 만난 기쁨이 마음에 교차했다. 한편으로는 꾸지람 들을 것이 겁나서 나지막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

하지만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나를 꼭 안아주기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은 내가 집을 나온 날부터 엄마가 경찰서를 수시로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나에 대해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왜 찾아다녔을까?’ 의문스러웠다. 혹시 집에 도착해서 엄마가 꾸짖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는데 엄마는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나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엄마는 워낙 자신의 감정을 우리에게 표현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엄마의 사랑 그리고 어머니 하나님

시간이 흘러 우리 남매는 하나둘씩 결혼을 했고, 막내 남동생이 결혼할 때가 되어 상견례 자리가 만들어졌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즐거웠다. 그런데 묵묵히 있던 엄마가 갑자기 사돈어른에게 이런 말을 했다.

“큰딸 시집 보낼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난 이제 어찌 사나 싶었습니다.”

어머니 하나님, 하늘 어머니, 어머니 하나님 사랑
여태껏 전혀 몰랐던, 몰라도 너무 몰랐던 엄마의 진심.

동생의 결혼을 위한 자리였지만 엄마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들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무뚝뚝한 엄마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고백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순간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떠올랐다. 아빠의 부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불만을 모두 엄마에게 화풀이했다. 엄마의 말이라면 절대 듣지 않았고, 엄마의 가슴을 후비는 말도 서슴없었다. 비록 살갑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딸이라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엄마였다. 가출 후 돌아온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딸이 더 방황할까 걱정했던 엄마의 사랑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 때문에 고생한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때로는 미웠을 딸의 가출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 헤맨 엄마의 모습 속에, 6천 년의 시간 동안 탕자인 자녀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신 어머니 하나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돌아온 자녀라도 행여나 다시 떠나갈까 늘 염려하시며, 검붉은 죄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수없이 용서해 주시는 어머니 하나님. 그 끝없는 사랑에 그저 감사와 영광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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